2024년의 끝자락에서 한해를 반추하며

가끔 흩어지는 생각들을 붙잡고 싶어 아이폰에 메모를 후루룩 쓰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 아이폰 메모장을 다시 꺼내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올해 초에 적은 짧은 메모도 그런 경우이다.

24년 1월 22일에 생각 한편

나답게 산다는 게 아직 모호하지만, 강렬했던 순간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큰 틀에서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올해의 몇가지 기억나는 조각들을 기록한다.

생각

1. 가장 많이 되내인 생각

Don't lose self conviction.
피드백(이라 쓰고 냉엄한 평가)이 만연한 빡빡한 컨설팅 라이프에서 멘탈이 나가기가 쉬운 것 같다. 특히 모듈원도 생기는 3년차가 되니, 주니어라는 방패도 무용지물이 된다. 아기새처럼 나를 바라보는 모듈원과 매처럼 언제든지 나를 쪼아댈 수 있는 상사 사이에서 끼인 상태가 되면 내가 잘하고 있는지 시시각각 의심하는 아노미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의심을 멀리하고, 해낼 수 있다라는 자기 확신을 가져야 한다. 결국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고, 어차피 해내야 할 것이라면 자신감 있게 뚫고 가야 한다. 그러니 쫄지 말고 돌격하자

사람이 만사다
컨설팅은 결국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을 이끄는 것이 진정한 value이다. 컨설턴트라면 쌩쌩 몰아치는 바람과 같이 논리성으로만 무장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햇살같음도 보유해야 한다. 까마득한 엑셀과 철저한 스토리라인으로 중무장을 한들, 듣는 사람의 마음의 철옹성과 같이 닫혀 있다면 컨설턴트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무용한 제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의 입장에 온전히 녹아들어, 이 사람의 pain point와 needs를 파악하는 노력을 항상 기울여야 한다.

쨍쨍한 햇살같은 컨설턴트 되기...!

2. 일말의 아쉬움

부족한 여유
나는 엄마가 되게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도 화나는 순간마저 웃음으로 치환하는 낙천성을 좋아한다. 근데 일하다가 문득 거울 속 모습에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 걸 보고는, 올해 생각보다 인상을 많이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이 팍팍한 순간에도 웃음과 여유를 잃지 말고, 인상 쓰기보다 인상 깊은 순간들을 만들어내자!

중심 잡기
주말 아침에 하는 운동은 매우 힐링되는 소중한 순간이다. 평일에 운동을 하지 못하니 주말 밖에는 시간이 없는데, 금/토요일에 약속으로 과음을 하다보면 운동에 늦거나 못가는 경우들이 있다. 중요한 우선순위들을 위해 일부는 포기하는 결단력을 갖추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자

3. Self-칭찬

점진적 개선
올해 두개의 프로젝트를 했는데,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첫번째 프로젝트에서는 내게 큰 모듈을 떼어주고 계속 한계를 테스트 당하는 느낌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도 중요한 프로젝트이다보니,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도 느껴졌다. 처음에는 최상의 호흡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벽같이 이어지는 작업이나, 매주 들고가는 아웃풋을 보며 점점 신뢰감을 얻었던 거 같고 C-level 보고가 성공적으로 잘 끝난 이후에는 클라이언트가 많은 칭찬과 감사함을 표현해주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뒷풀이에서, counterparty가 내게 찾아와 제일 좋아하는 컨설턴트가 되었다라고 말해준 점이나, 이 프로젝트의 아웃풋이 잘 나와서 해외 유수의 MBA case study로 실렸다는 게 더욱 뜻깊었다.

두번째 프로젝트에서는 처음 도전하는 실행 프로젝트였고, 오랜 경력을 가진 현업에게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value를 줘야 한다는 것이 챌린징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나며 kpi를 초과 달성하고, c-level의 호응도 얻으며 클라이언트와 케이스 리더십에 appreciation을 받게 되었다.

두 개의 프로젝트를 하며, 처음부터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결과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달성하는 경험들을 했다. 이 경험들이 앞으로 또다른 힘든 도전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의 자양분이 토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화자찬스러워 머쓱하지만, 글 한모퉁이에 기록하게 되었다.

승진까지 고생했다!

경험

1. Exotic 여행

스페인 섬, 테네리페
회사에서 각 테뉴어별로 글로벌 트레이닝을 보내주는데, 올해는 SAC 트레이닝을 테네리페라는 섬에서 했다. 스페인의 섬이지만 아프리카 대륙과 더 가까운 이국적인 위치의 섬에서 참 많이 웃고 마시고 떠들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풍경을 잔뜩 만끽할 수 있는 여유,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여서 오래오래 추억할 만한 여행이 된 거 같다.

2. Eye-opening 도서

피터 비에리, 자기 결정
24년 5월 불국사에 다녀왔다. 템플 스테이가 끝난 후, 경주의 독립서점에서 마음에 와닿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이었다. 항상 철학 공부에 대한 갈증은 있었지만, 시간 내어 탐독할 여유가 없었는데, 마침 혼자만의 데이트를 하며 읽어보니 평소에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느끼고 있던 내용들이 있어 반가웠다.

그 중에서도,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아래와 같이 노션에 기록하고 몇번씩 읽어보곤 한다.

나의 언어를 찾는다 (모든 것의 열쇠는 언어다)
자신에 대해 결정한다는 것은 사고를 조망하는 능력과 사물의 명확함을 추구하는 일 모두에 언제나 굽힘 없는 열정을 가진다는 것과 통합니다.
-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명확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독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입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쓴 글이 어떤 울림을 가지는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 내 상상력의 물결, 상상의 중력에 이끌려 들어갈 때, 오직 그때만이 진정으로 나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막스 프리쉬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
- 자신이 누구인지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내가 본능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와 닮아 있다.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고,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나만의 정제된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 나다운 삶 - 을 찾게 된다. 결국 인생은 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 관점에서 좋은 인생을 산다는 건, 멋있는 나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올해의 템플 스테이는 단언코 불국사24

3. 미각의 지평을 넓힌 식사

파인다이닝 애찬론자는 아니다. 오히려 같은 메뉴도 며칠 연속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무던한 입맛을 가진 사람에 가깝다. 다만, 잔잔한 일상 속 파동과 같은 경험들은 돈을 내고 체험 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파동을 만들어낸 미식의 경험들이 있어 몇자를 적는다.

한우 오마카세 본앤브레드
맛있는 고기를 정말 많이 준다. 고기를 한평생 먹었지만, 또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 곳이어서 인상 깊다. 어떤 상태의 고기를 가져오는 지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굽는지도 맛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라는 생각을 했다.

스시 오마카세 정대
미스터 초밥왕을 재미있게 읽으며 장인 정신에 대한 존경심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런 장인 정신을 잘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재료 하나하나를 고생스럽게 공수해와서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에서 1차 놀라움이 있고, 언어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맛에서 2차 놀라움이 있었다.


적다보니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이 기억 속에 점점 또렷하게 새겨지게 된다.
다가오는 25년에는 새로운 경험과 생각들 속에서 더 뚜렷한 사람이 되는 한해가 되길.